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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오늘도 떠나는 꿈 "내가 머무는 동안 알람브라 궁전이 야간 개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 하렘에서 인생을 보낸 이슬람 군주처럼 보름을 탕진했고,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밤의 알람브라 궁전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그라나다를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저 멀찌감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만 보면서, 마치 궁전과 후궁을 남겨둔 채 허겁지겁 도망치는 군주처럼. 마드리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중에 다시 와서 밤의 알람브라 궁전을 꼭 봐야지, 하는 초등학생 같은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여행에서 두 번 다시란 없으니까. 다시 왔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 국경 쪽으로 세차게 부는 바람 속으로 날아가던 모자처럼 여행지에 내가 남겨 두고 온 것은 또 얼마나 많.. 더보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오든 그 손님들로 인해서 여인숙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조용하게 머물다가 지나가든 밤새 소란을 피우든, 다음 날 아침이면 손님들은 여인숙을 나설 테고, 저녁이 되면 여인숙은 다시 간판에 불을 밝히고 새로운 손님을 기다릴 것이다. 어린 시절, 매일 저녁마다 내가 보았듯이, 여인숙은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눈을 뜰 것이다. 루미의 시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 너의 기분은 어땠는지? 마음 속으로 어떤 손님이 찾아왔는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잠자리를 구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지내다가 떠난 고마운 손님이었는지, 이불이 더럽다고 화를 내느라 밤새 잠들지도 못하다가 급기야 집을 부수기 시작했던 난폭한 손님이었는지. 네 마음 속으로 그 어떤 손님들이 찾아.. 더보기
"말하자면 이런 식이에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중요한 건 우리가 결코 이 날개를 가질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날개는 왜 존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잘 알아야만 합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었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 더보기
날마다 하나의 낮이 종말을 고한다 우리가 중학생이던 1983년, 일요일 아침마다 MBC에서 이라는 일본 만화영화 시리즈를 방영했다. 그 만화영화는 1999년 9월 9일 0시 9분 9초에 1000년을 주기로 한 유성이 지구와 충돌해 인류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을 배경으로 깔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했다. 1999년이면 우리가 서른 살이 되는 해이니, 그 정도면 인생을 다 산 것인데 지구가 멸망한들 뭐가 아쉬울까? 에서 말한 종말의 시간인 1999년을 넘기고 보니, 결코 인생이 쉽게 끝나는 건 아니었다. 그렇긴 해도 서른이 되면서 뜨겁고 환하던 낮의 인생은 끝이 난 듯한 기분은 들었다. 그다음에는 어둡고 서늘한, 말하자면 밤의 인생이 시작됐다. 낮과 밤은 이토록 다른게 왜 이 둘을 한데 묶어서 하루라고 말하는지. 마찬가지로 서른 이.. 더보기
원더보이 p.157 "그 산을 반정도 올라가자 그쯤에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거기는 대나무숲이었다. 머리 위쪽에서 바람을 맞은 댓잎들이 차르르 소리를 냈다. 죽순들이 그 소리를 향해 쭉쭉 뻗어가고 있었다. 키 큰 대나무 때문에 하늘은 더 멀어 보였다. 그 숲에서 대나무와 바람과 하늘과 나는 제각기 혼자였다.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나는 그렇게 혼자이리라. 태양처럼, 혹은 달처럼, 혼자라면 나는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고, 또 가지 못할 곳이 없었다. 그럭저럭 살아서 장수할 수도 있었고, 인생을 낭비하다가 젊어서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자유가 아니었다. 댓잎을 흔들던 바람에도 나는 쓰러질 정도였다. 비틀비틀 나는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숲에서 나는 생각했다. 교과서에서 본, 한반도 모..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