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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 장아찌 정도의 시니컬함

" "남편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100점 만점에 몇 점입니까?"

이런 유의 질문을 항간의 잡지―특히 여성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대답하는 쪽도 "글쎄요, 대답하기 좀 그렇네…… 65점쯤 되려나"라는 둥, 고심하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한다.

  그런 기사를 읽으면 나는 늘 당황하고 만다. 65점짜리 남편이란 과연 어떤 남편일까. A씨의 남편은 '집안일은 잘 도와주는데 섹스가 약해서 65점'일 수도 있고, B씨의 남편은 '섹스는 짐승처럼 강한데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아서 65점'일 수도 있다. C씨의 남편은 '얼굴은 못생겼지만 성격이 좋아서 65점'일 수도 있고, D씨의 남편은 '너무 사랑하니까 왠지 겁이 나서 65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A, B,C, D씨가 말한 점수는 같은 65점이라도 방향성이나 점수의 질이 전혀 다른 셈이다. 그런데 65라는 숫자로 변환되고 나면 A씨의 남편이나 B씨의 남편, C씨의 남편, D씨의 남편 모두 똑같은 65점이라는 틀에 속하고 만다. 그러니 그런 질문이나 답변에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

  이렇듯 앙케트라는 것은 대체로 불쾌하고 무의미한 것이 많다. 나도 한번은 "당신의 행복지수는 10점 만점에 몇 점입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던 적이 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면 뭐라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남극대륙이란 존재는 당신에게 10점 만점에 몇 점일까요?" 그렇게 묻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남극대륙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건 싫어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펭귄이 사니까 8점' 또는 '추운 게 싫으니까 2점'이란 식으로 평가할 수는 있겠지만, 이런 평가는 완전히 무의미하다. 펭귄이나 추위는 개별적인 측면의 속성이지 총체적인 상황과는 별 관계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유의 질문을 받으면 '모르겠다'나 '뭐라 대답할 수 없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로 답한다. 물론 지금 이 글처럼 '모르겠다'고 대답하게 된 경위를 세세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러자면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테고, 무엇보다 질문자는 그런 설명을 원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은 그저 '6점'이니 '8.5점'이니 하는 수치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앙케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신문 여론조사의 결과를 보면 '모르겠다'나 '대답하고 싶지 않다'에 체크한 사람의 비율이 대충 50퍼센트 정도인데, 나는 그 사람들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한다.

  가령 '당신은 미국이란 나라를 신뢰합니까? 다음 보기 중에서 고르세요'

① 신뢰한다

② 어느 정도 신뢰한다

③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④ 신뢰하지 않는다

⑤ 모르겠다

  이런 앙케트에서는 ⑤ 밖에 고를 수 없지 않을까요. 미국이든 일본이든 니카라과든, 신뢰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신뢰할 수 없는 부분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이런 질문에 '모르겠다'고 대답한 사람을 오히려 신뢰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앙케트나 여론조사에 '그런 건 모르겠다'나 '뭐라 말할 수 없다'고만 대답한다면 그 상황도 씁쓸하지 않을까 싶다. 여론조사 그래프에서 '모르겠다'는 대답이 85퍼센트를 차지한다면 지금 이런 주장을 하는 나조차도 섬뜩해질 것 같고, 그렇게 시니컬한 사회에 살고 싶은 생각도 없어질 듯하다. 역시 어려운 문제다. 시니컬함이란 카레라이스에 곁들이 채소 장아찌 정도의 비율로 존재하는 것이 건전하지 않을까."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 장아찌 정도의 시니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