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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_bird 2015. 8. 26. 11:17

p.51

사라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는 건 분명히 위험한 일이야"

"위험하다고, 어떻게?"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고,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사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만은 기억해두는 게 좋아.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p.57

나는 정말로 죽어 버린 것인지도 몰라. 쓰쿠루는 그때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전해 여름, 친구 네 명에게서 존재를 부정당했을 때 다자키 쓰쿠루라는 소년은 사실상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존재의 겉모습만은 겨우 유지되었지만 그마저 약 반년 사이에 크게 바뀌어 버렸다. 체형도 얼굴도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바뀌었다. 불어오는 바람의 감촉이나 흐르는 물소리나 구름 사이로 비쳐 드는 빛의 기운이나 계절의 꽃 색깔도 이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또는 완전히 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여기 있는 것은, 이렇게 거울에 비치는 것은 언뜻 다자키 쓰쿠루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편의상 다자키 쓰쿠루라고 부르는 그릇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그 내용물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가 아직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딱히 달리 부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p.114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것, 또한 알지만 확인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지. 그런 건 어차피 자네가 말했듯이 가설의 위태로운 연장에 지나지 않아"

 


p.149

아무튼 하이다의 존재가 사라져 버리자 그 친구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의미였는지, 하루하루의 생활에 얼마나 풍성한 색채감을 주었는지 쓰쿠루는 새삼 실감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이다와 나누었던 온갖 이야기들, 그 특유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그리움과 함께 떠올랐다. 그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때로 읽어 주던 책들, 그가 해설하는 세상일들, 독특한 유머, 적확한 인용, 그가 만들어 주는 음식, 끓여 주는 커피. 하이다가 뒤에 남겨 둔 공백을 그는 일상생활의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렇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는데, 나는 도대체 하이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쓰쿠루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친구의 내면에 과연 무엇을 남길 수 있었을까?

나는 결국 혼자 남겨질 운명일지도 모른다. 쓰쿠루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다가왔다가는 이윽고 사라진다. 그들은 쓰쿠루 속에 무엇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 또는 찾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체념하고(또는 실망하고 화가 나서) 떠나 버리는 것 같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추어 버린다. 설명도 없고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따스한 피가 흐르고 아직도 조용히 맥박 치는 인연의 끈을 날카롭고 소리없는 손도끼로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분명 자기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낙담케 하는 뭔가가 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그는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결국 남에게 내밀 수 있는 건 뭐 하나 가진 게 없어. 아니, 그러고 보면 나 자신에게도 내밀 것이 하나도 없을지 모르지. 



p.180

이제 어디로 가면 좋지. 쓰쿠루는 가로등에 기대어 생각했다. 손목시계의 바늘은 7시를 가리키려 했다. 하늘에는 아직 어슴푸레한 빛이 남았지만, 길가에 늘어선 쇼윈도는 사람을 유혹하며 점점 밝기를 더해 갔다. 시각은 아직 이르다. 당장 해야만 할 일도 없다. 아직 집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조용한 장소에서 혼자 있고 싶지 않다. 가려고만 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거의 모든 곳으로. 그렇지만 실제로 어디로 가면 좋을지, 쓰쿠루의 뇌리에는 구체적인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

자, 어디로 가면 좋지?

결국 가야 할 곳은 하나뿐이었다.

그는 큰길을 따라 도쿄 역까지 걸었다. 야에스 출입구에서 표를 끊어 구내로 들어가 야마노테 선의 플랫폼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거의 1분 간격으로 다가와서는 수많은 사람을 토해 내고 또한 수많은 사람을 황급히 삼키고 사라져가는 녹색 차량의 동체들을 바라보며 한 시간 정도를 보냈다. 그는 그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다만 그 광경을 망연히 눈길로 쫓았다. 광망은 그의 마음속 아픔을 어루만져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반복성은 늘 그랬듯이 그의 마음을 빼앗아 적어도 시간에 대한 의식은 마비시켜 주었다. 

사람들은 어디서랄것도 없이 줄줄이 밀려와 스스로 질서 있게 늘어서서 차례차례 열차에 올라타고 어딘가로 실려 갔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쓰쿠루를 감동했다. 그리고 또한 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녹색 철도 차량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의 마음을 찡하게 했다. 마치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차량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자연스럽게 조직적으로 옮겨진다는 것.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제각기 가야 할 장소와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것. 



p.201

"아니, 세월만이 아니야. 처음에는 정말 너라고 생각지도 못했어. 물론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뭐라고 할까, 말랐으면서도 예리한 느낌이야. 볼이 홀쭉하고 눈길은 깊고 날카로워졌어. 옛날에는 둥그스름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였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해, 자신의 소멸에 대해 반년 가까이 진지하게 고뇌한 결과라고, 그리고 그런 나날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크게 바꾸어 버렸다고, 쓰쿠루는 말할 수 없었다. 드러내 놓고 말한들 그때의 절박한 마음을 반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애당초 말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다. 쓰쿠루는 묵묵히 상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p.243

"그래, 그리 드문 일이 아닐지도 몰라. 네 말대로야.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그런 진실과 사정없이 맞닥뜨려야 한다는 건 본인에게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야. 정말 힘들어. 일반론으로는 해결이 안 돼.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마치 항해하는 배의 갑판에서 갑자기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겨쳐진 듯한 기분이야."

 

p.244

"...어이, 이런거 엄청난 패러독스라는 생각 안 들어?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발견하게 돼. 그리고 발견할수록 자기 자신을 상실해 가는 거야."
 

p.308

사람의 마음은 밤의 새다. 조용히 뭔가를 기다리다가 때가 오면 일직선으로 그쪽을 향해 날아간다.

 

p.311

어떤 꿈이라도 좋아, 어떤 기분이 들어도 좋아. 다시 한 번 시로가 나오는 꿈을 꾸면 좋을 텐데.

이윽고 잠이 찾아왔지만, 거기에 꿈은 없었다.

 

p.342

쓰쿠루는 말을 계속했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마치 항해하는 배의 갑판에서 밤바다 속으로 갑자기 혼자만 떠밀려 빠져 버린 듯한 기분이었어."

그렇게 말하고 쓰쿠루는 그 말이 얼마 전 아카가 입에 담은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한 호흡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누군가에게 떠밀린 건지, 아니면 제멋대로 떨어져 버린 건지, 그건 잘 몰라. 아무큰 배는 항해를 계속하고 나는 어둡고 차가운 물 속에서 갑판의 불빛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봐. 배 위에서는 아무도, 승객도 선원도 내가 바다에 빠졌다는 것을 몰라. 주위에는 붙잡을 것도 없어. 그때의 공포를 난 지금도 품고 있어. 자신의 존재가 느닷없이 부정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홀로 밤바다 속에 내팽겨쳐지는 공포. 아마 그 때문에 나는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었을 거야. 다른 사람과 나 사이에 늘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지."

 

 

p.363

가 버린 시간이 날카롭고 긴 꼬챙이가 되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소리 없는 은색 고통이 다가와 등골을 차갑고 딱딱한 얼음 기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아픔은 언제까지고 같은 강도로 거기 머물렀다. 그는 숨을 멈추고 눈을 꼭 감은 채 가만히 아픔을 견뎌 냈다. 알프레트 브렌델은 단정한 연주를 이어 갔다. 소곡집은 제1년 스위스에서 제2년 이탈리아로 옮겨 갔다.

그때 그는 비로소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혼의 맨 밑바닥에서 다자키 쓰쿠루는 이해했다. 사람의 마음과 사람의 마음은 조화만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처와 상처로 깊이 연결된 것이다. 아픔과 아픔으로 나약함과 나약함으로 이어진다. 비통한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땅 위에 피 흘리지 않는 용서는 없고, 가슴 아픈 상실을 통과하지 않는 수용은 없다. 그것이 진정한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p.378

"... 저기, 쓰쿠루, 우리가 우리였다는 거,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었던거야. 우리가 하나의 그룹으로 일체감을 가졌다는 것 말이야. 난 그렇게 생각해. 설령 그것이 몇 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았어. 나도 너도. 그리고 살아남은 인간에게는 살아남은 인간으로서 질 수밖에 없는 책무가 있어. 그건, 가능한 한 이대로 확고하게 여기에서 살아가는 거야. 설령 온갖 일들이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해도."

 

 

p.387

아마도 다시는 이 장소에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에리를 만날 일도 없을지 모른다. 두 사람은 제각기 정해진 장소에서 각자의 길을 앞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아오가 말했듯이 이제 돌아갈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어딘가에서 물처럼 소리도 없이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형태가 없는 투명한 슬픔이었다. 자신의 슬픔이면서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는 슬픔이었다. 가슴이 헤집은 듯 아프고 숨이 막혔다.

포장도로에 나서자마자 갓길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끄고 핸들에 엎드린 채 눈을 감았다. 심장의 고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시간을 들여 천천히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몸의 중심 가까이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1년 내내 녹지 않는 동토의 중심부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그것이 가슴의 통증과 숨 막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자기 안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여태 그는 몰랐다.

그렇지만 그것은 올바른 가슴 아픔이며 올바른 숨 막힘이었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 차가운 중심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녹여 내야 한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그러나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동토를 녹이기 위해서 쓰쿠루는 다른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p.427

대학생 때 죽음만 생각하던 나날들을 쓰쿠루는 생각해보았다. 벌써 16년 전 일이다. 그즈음 그는 생각했다. 그저 가만히 자신의 내면 깊은 곳만 응시하면 이윽고 심장이 자연스럽게 멈춰버릴 것이라고. 정신을 날카롭게 집중하고 한곳에 초점을 맞추면 렌즈가 햇빛을 모아 종이에 불을 피우듯 심장에 치명상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뜻에 반해 몇 달이 지나도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심장은 그렇게 간단히 멈추지 않는 것이다.

 

 

p.436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리지는 않았어." 그것이 쓰쿠루가 핀란드의 호숫가에서 에리와 헤어질 때 했어야 할, 그러나 그때 말하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